옛집
집을 개축하기로 정한 이후로 줄곳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시골에 내려갈때마다 깜박하고 그냥 내려가 발을 구르곤했었는데 결국 철거를 앞둔 오늘에서야 카메라를 들고 내려왔다. 그것도 잊어버릴까봐 전날 밤에 미리 챙겨서 차에 실었다.
그동안 틈틈히 왠만한 짐은 모두 옴겨놓은 상태라 예전 모습 그대로를 남길수는 없었지만 건물 자체는 그대로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 본다.
새 집이 들어선후 거실에 들러앉아 옛집에 사진들을 둘러보면서 추억을 되집어볼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남아 있을지 철거해야할지 고민이 많은 장독대. 슬아아빠가 화덕에 불을 지피고 있다. 저 솥에 불을 지피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음식을 한다고 봐야하는데 오늘은 그냥 쓰레기를 태우고 있단다. 저 화덕 옆에는 메주를 쑤던 드럼통 화덕이 쌍으로 있었다. 드럼통에는 한번에 콩 한가마가 들어갔으니 한번에 두가마니씩 메주를 쑨셈이다. 하루에 3번을 쑤었으니 6가마니씩을 쑨셈이다. 그옆에는 우물이 있었다. 수동식 펌프로 시작해 양수펌프를 이용한 수도까지 수십년을 써오다 문제가 있어 새로 파려했으나 우물정을 파는 장비가 들어오질 못해 지금 수도가 설치되어 있는 대문간으로 옴겨졌었다. 겨울이면 따뜻하고 여름이면 손이시리도록 찬물이 나오던 좋은 우물이였는데. 한여름에 등욕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대문간이다. 어려서 저 대문을 만들던 목수아저씨의 대패질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실 대문이라고 달아는 놨지만 저문을 통해 드나드는 일은 화장실 갈때와 스레기장에 쓰레기 버리러 가는일 외에는 거의 없었던것 같다. 좌측 아궁이가 있는 방 자리가 예전엔 집안에 1등 살림살이인 소가 살던 외양간이였다. 소를 팔고나서 방을 들였지만 거의 창고역활로만 쓰였다. 방 좌측에 함석으로 만든 문짝이 있는데 작은창고로 쓰이고 있었지만 소를 키울때는 작두가 있어 여물을 썰던 곳이다. 주로 엄니가 여물을 먹이고 나는 썰었었다.
대문 우측은 원래 잠실이였다. 봄, 가을에는 누에를 쳤고 겨울에는 메주를 매달아 말리는 곳이었다. 대만에서 실크수입을 중단하면서 누에 농사를 접었던걸로 기억한다. 메주도 별로 수입이 좋지 않아 중단하고 누에를 치던 뽕밭에 뽕나무를 캐내고 사과나무를 심었다. 그 뒤로는 사과저장고로 사용했었다. 한때 인기가 좋았던 사과도 나무가 늙어 수입이 별로 안좋았고 연세에 비해 너무 힘이들어 과수농사를 접게 되었고 그뒤로 절반은 방을 들였고 절반은 창고로 사용했다. 매형이 주문진에 근무할때 누나가 한때 이곳에서 살았었다.
구옥 본걸물 전경이다. 초가지붕으로 시작해 기와지붕을 올린지도 40여년이 된걸로 기억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 기와를 올린걸로 기억된다. 앞 화단에 있던 포도와 능소화 덩굴을 잘라냈고 화초들은 모두 캐내 밖에 가식을 해놔 화단이 썰렁하다.
엄니와 형수, 마눌님. 정면에 방이 건넛방, 그옆 함석문짝 있는곳이 나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있는 부엌이다.
앞 화단에 있던 더덕까지 모두 캐내고 있는 형수님. 어차피 묻힐곳이라...
엄니가 그렇게 정성을 들여 가꿔오던 화단이다. 지금은 모두 캐내 썰렁하지만 이른봄 매화를 시작으로 첫눈이 내릴때까지 쉬지 않고 꽃들이 피던 곳이다. 우리가 어릴때는 복숭아 나무가 탐스러웠고, 포도덩굴을 마당위로 올려 여름내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던 곳이기도 하다.
큰집 형님이 진작에 철거해 갔지만 이곳에 보온재로 하우스 처럼 지어진 사과 저장고가 있었다. 그 이전에는 돼지 우리도 있었고, 잠실이 있었다. 정면에 남아있는 건물은 한때 논농사를 지을때 사용했던 벼 건조장이다. 별로 많이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논농사를 접었던것 같다.
잠실에서 사과저장를 거쳐 창고로 탈바꿈한 건물이다.
장독대 옆에서 이전한 수돗가. 정면에 옥외 화장실이 보인다.
도로에서 바라본 담장과 외곽대문. 담장을 보면 대문쪽으로 새로 쌓은 흔적을 볼수있다. 몇해전 지나던 차가 대문과 담을 뚫고 집안으로 들어온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일어난 사고라 다행히 사람은 안다쳤지만 담을 새로 쌓고 철문을 새로 해야만 했다.
도로 좌측면에서 바라본 본가 모습.
우체국 앞에서 바라본 모습.